농기계 구입지원제도 전면개정, 현실벽 막혀 시작도 전 좌초

이솝우화 ‘해와 구름의 내기’ 같은 ‘유화(柔和)정책’ 개발해야

농가경영비 절감을 위한 농기계 가격안정, 고품질농기계 공급과 국내 농기계 산업육성을 이유로 대폭 개정이 추진됐던 ‘농업기계 구입지원사업 시행지침’ 개정이 결국 시장반대에 부딪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에 따라 정부융자지원제도 개선, 사후봉사이행 보증제도 폐지, 공급지역제한 철폐, 농협 중앙전산제도 개선 등은 종전 방식대로 유지됐고, 원가조사보고서 시행은 백지화됐다. 또한 가격표시제는 존속시키되 어려운 시장상황을 고려해 단속에 나서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져 사실상 폐기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농기계 구입지원이 아니라 농기계 가격관리에 있다는 것이 시장의 중론이다. 농기계 가격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는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이기 때문이다. 이번 농업기계 구입지원사업 시행지침 개정과 관련해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들을 집중 분석해본다. <편집자註>

◇ 농업기계 구입지원사업 개정 추진배경

정부는 그동안 농기계 가격거품 해소를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개발해왔다. 농기계 가격거품이 농기계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고질적인 병폐라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부풀려진 가격은 건전한 유통시장의 신뢰를 해치고 과당경쟁과 품질저하의 원인이 되어 결국 국제경쟁력마저 잃게 만드는 악순환의 연결고리가 되어왔다.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원가자료제출, 농기계가격등록, 보조사업요건 강화, 농협·조합 등을 통한 가격통제 등 다양한 정책들을 쏟아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번 개정추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농기계가격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융자지원금을 투입해야 하는 정부입장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종별, 규격별로 지원한도액을 정하는 현행방식에서 벗어나 경영체별로 영농규모에 맞는 한도액를 정해 주고 그 범위 내에서 공급업체와 경영체간 자율로 융자지원금을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정부의 개입 여지를 줄여보려 한 것으로 관측된다.

또한 이미 지난해말 발표를 통해 올해 7월부터 원가조사보고서 제도시행을 앞두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이달 말까지는 원가조사보고서 제도시행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개정작업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정부는 이와 함께 일선대리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후봉사이행보증제도와 공급지역 제한문제, 농협 중앙정산에 따른 판매수수료 등도 함께 묶어 일괄 처리할 계획이었다. 정부는 이를 위해 지난 4월말부터 농기계조합, 농협중앙회, 농촌진흥청, 실용화재단, 농업인단체, 산업체와 연석회의 통해 개정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고 개선방안 도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시장반발에 부딪쳐 시작도 해보기 전에 칼을 거둘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개정이 추진된 사안들을 과제별로 살펴본다.

◇ 정부지원대상 농업기계 지원한도액 

현행 기종별, 규격별로 정부융자 지원한도액을 정해주던 방식에서 영농경영체(전업농, 영농법인, 일반농가, 임작업농 등)별로 종합적인 농기계 구입융자금 한도를 정해주고 경영체별로 그 범위 내에서 자율적으로 농기계 구입지원을 받도록 할 계획 이었다.

또한 농기계은행사업용으로 구매하는 농기계에 대해서는 농협 주관 하에 원가계산을 실시해 농협과 업체가 시담을 통해 적정가격으로 구입하도록 해 농협이 구입한 농기계가격을 기준으 로 융자금액을 산정한다는 방침이었다.

현행 농기계가격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부풀려진 가격에 맞춰 융자지원을 할 경우 국가예산 집행의 부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원천방지해 보자는 취지다. 그러나 경영체별로 종합한도액을 정해주기 위해서는 경영체별로 영농규모, 작목특성, 이용조직, 매출 등의 매개변수가 많아 한도액을 정하기 위한 기준마련이 쉽지 않아 공정성 논란을 불러올 수 있고, 경영체의 지원금 불법전용이 손쉬워 이에 따른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종전대로 기종별 지원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다만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는 융자지원인 만큼 한도액 설정은 다소 유동적으로 운용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특히 농기계 특성에 따라 농가의 생산성 기여도와 실효성을 따져 융자율을 차등적용하는 방안 등도 검토되고 있다.

◇ 농기계 공급지역 제한제도 폐지

정부지원대상 농기계 공급자의 자격과 관련해 현행 사후봉사업소 설치의무를 폐지하기 위한 방안이 검토됐다. 즉 현행 사후봉사이행보증제도를 폐지하고 현행 공급자의 주 사업장이 소재한 시·군이나 연 접 시·군에 대해서만 농기계를 공급하도록 한 방식에서 공급지역 제한 없이 전국 어디든 공급할 수 있도록 자율화한다는 계획이었다.

취지자체는 규제를 풀어 시장논리에 따라 전국 어디든 자유롭게 거래가 이뤄지도록 한다는 경기부양책으로 받아드려 지지만 사후봉사체계 미흡으로 인해 수리봉사가 제때 이뤄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 피해가 영농적기를 놓친 농업인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완화하려던 방침은 사후봉사이행보증제도의 유지 및 현행 공급자 자격요건 규제와 공급지역 제한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 농기계 판매대금 중앙결제

현행 농협중앙회와 농기계 공급자 사이에 ‘농기계 대출금 중앙결제 계약’이 체결된 경우에는 농기계 판매대금을 농협이 농민에게 받아 판매자에게 지급해주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 경우 판매업자는 농협에 판매수수료 명목으로 판매대금의 1%를 수수료로 지급하고 있다.

이를 개선해 농기계 판매에 따른 기대 인도 시 판매자가 직접 농민으로부터 판매대금을 받도록 해 농협에 지불해야 할 판매수수료 지급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러나 이럴 경우에는 대리점이 본사로부터 외상매입을 잡을 수 있는 여신한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판매자가 개별적으로 농민에게서 직접 판매대금을 수령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이에 따른 채권추심의 부실화 우려가 있어 종전처럼 농협을 통한 중앙결제방식을 유지하기로 했다.

◇ 원가조사보고서 제도시행 폐지

원가조사보고서 제출제도는 농기계가격의 적정성을 정부가 직접 살펴보기 위해 지난해 7월부터 시장지배력이 높은 트랙터, 콤바인, 승용이앙기, 로타베이터, 로우더 등 5개 기종에 대해 우선적으로 시행에 들어가고 올해부터 모든 농기계에 적용하려고 했다.

농기계가격의 적정성을 따져 농기계 가격거품을 잡아보자는 취지의 제도였다. 그러나 행정능력이 떨어지는 영세업체들의 반발에 부딪쳐 올해 1월 부터 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올해 7월부터 트랙터, 콤바인, 승용이앙기 등 3개 기종으로 축소해 시행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수입업체들의 통상마찰 반발과 국내업체들의 역차별 논란에 휩싸이며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업체 입장에서는 농협  농기계은행사업의 시담가격, 농협 계통구매가격, 조달가격, 실거래 융자지원가격 등이 있어서 충분히 실질 농기계가격을 살펴볼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비용을 드려 원가조사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것은 또 다른 규제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정부는 원가조사 보고서 제도시행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 유명무실한 가격표시제

정부는 농기계 유통질서가 문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해 7월부터 농기계 및 부품에 대해 가격표시제를 시행하면서 올해 1월부터 집중단속을 통해 제도정착을 하겠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일선현장에서 이를 지키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일선현장에서 현실적으로 이를 제대로 지켜야 할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농민들조차도 일부 붙어있는 가격표시에 대해 신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일선현장에서는 가격표를 붙이고 떼는 공임만 늘어난다고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알기 때문에 일선현장의 어려움을 감안해 단속계획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이미 실효성을 잃은 규제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정부는 가격표시제의 제도자체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물가안정 및 유통질서 문란행위 방지효과가 있다는 설명이지만 농기계 구입지원사업 시행지침 개정은 해당 실무부서 전결권이 있는 반면 가격표시제 개정은 장관결재를 필요로 하는 농식품부 고시로 제정됐기 때문에 개정사유를 복명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존치시키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 농기계 가격관리를 위한 ‘유화정책’ 필요

농기계 가격은 어떤 식으로든 관리가 돼야 한다. 가격을 부풀려 정부융자지원금이나 보조금을 많이 받아내는 것은 국민의 세금을 횡령하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당한 할인판매를 통해 건전한 시장질서를 교란하고 선량한 공급업체의 제품개발 의욕을 저해하는 것은 곧 산업경쟁력의 약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격거품을 막기 위한 규제일변도의 제도는 시장의 반발을 불러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규제를 피해가는 편법이 생겨나고 이를 통한 더 큰 부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 스스로의 제기능이 작동할 수 있는 친화적인 유화정책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솝우화의 ‘해와 구름의 내기’처럼 강제로 외투를 벗기게 하기 보다는 스스로 외투를 벗도록 하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제도도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농협의 ‘농기계은행사업’이나 시군농업기술센터의 ‘농기계임대사업’ 은 좋은 모델이 될 수도 있다.

농기계은행사업의 역효과와 농기계임대사업의 사후관리 어려움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업체들은 너도 나도 참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농기계 가격관리, 다시 원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상진  jsj1234@al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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