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초록의 감성이 온몸에 젖어드는 계절이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과 코끝에 스미는 흙내가 편안한 치악산 자락은 숨어들수록 뜨거운 숨결을 품고 있었다. 한적한 국도에서 벗어나 논물이 찰랑거리는 다랑논을 끼고 오르는 산길에는 많은 풍경들이 얽혀있었다. 미세한 바람에는 은빛 잎사귀를 팔랑거리며 호들갑을 떠는 은사시나무와 돌무더기 사이사이에 보라색 제비꽃, 각시붓꽃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대가람은커녕 초암(草庵)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절골’로 가는 비탈길에는 장끼가 긴 울음을 울며 초여름 맑은 하늘로 박차 오르고 산비둘기가 구순한 소리로 짝을 부른다. 높지만 장엄하지 않고 깊지만 지루하지 않은 그 길은 바로 피안(彼岸)으로 가는 언덕길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것이 또 몇 있으랴. 이름 모를 숱한 야생화와 기하학적 수피의 훤칠한 나무들, 발끝에 차이는 조약돌도 짧지 않은 시간과 적지 않은 시련을 겪은 후에야 지금의 모습처럼 해맑고 매끈해졌다. 더러는 과하고 더러는 허술해도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착오와 반성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숙이 부모를 아프게 하고 아집이 형제를 힘들게 했으며 편견이 친구를 괴롭힌 유년의 기억이 불현 듯 떠올라 모골이 송연해지던 지난 달, 텃밭 상추와 뒷산 두릅이 연하다는 품 넓은 친구의 인정스런 초대를 받았다.

오십도 중턱인 나이에 뼈를 깎는 반성을 하기에는 이미 집중력도 떨어지고 개선의 여지도 의심스러운 후회로 며칠간 스스로를 들볶다가 기분전화이라도 해야겠다는 이기심이 발동해 이른 아침, 그녀를 찾아 나섰다. 대기업 임원이었던 그녀 남편의 근무지가 옮겨지면서 헤어진 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날 그녀 생각에 밤잠도 설칠 만큼 마음이 들떴다. 남편의 순탄한 승진과 영특한 맏아들의 기발한 학교생활, 나이에 비해 살짝씩 늦된 행동으로 걱정을 하던 둘째아들이 결국 자폐진단을 받고 노심초사하다가 남편의 근무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골로 다시 이사를 했다는 등의 이런저런 소식을 간간이 주고받기는 했지만 얼굴을 대면하기는 이사를 간 후 이번이 처음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수수한 얼굴에다 왜소하기까지 한 체구 뒤에 감춰진 엄청난 내공의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서른 중반의 고만고만한 또래들의 시샘으로 늘상 자그락거리던 분위기에서 어느 한편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중심으로 좌중들의 신뢰를 이끌어내던 그녀의 뒷심은 여전할까. 적은 말수로 많은 말수의 핵심을 꿰뚫었고 차분한 눈빛으로 상대의 미세한 마음까지 놓치지 않는 그녀의 직관력은 여전할까. 여전히 양처이고 현모일까. 빼어난 눈썰미와 야무진 손끝으로 빈틈없던 살림살이는 여전할까. 어린 아들의 자전거를 밀어주던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자상하고 조용할까.

이른 아침에 출발했음에도 태생적으로 어두운 길눈을 밝혀가며 그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에 가까웠다. 인기척을 듣고 텃밭에서 나온 그녀는 흙 묻은 손을 털면서 커다란 모자를 벗었다. 환하게 웃으며 건네는 매실차 한 모금을 마시니 비로소 초행길의 긴장도 풀리고 사위가 눈에 들어왔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완만한 산세를 타고 골짝으로 울려 퍼지는 그녀 집은 허름한 농가를 개조한 소박한 귀틀집이었다. 모아둔 목돈도 없을뿐더러 건강한 삶터가 필요해서 부부가 직접 친환경으로 지었다며 환히 웃는 그녀는 기억 속의 30대가 아닌 중년의 골 깊은 주름이 얼굴에 잡혀있었다. 도시에서 살던 젊은 시절에는 꾸미지 않던 외모를 시골살이의 골물 중에 방치했을 게 분명한데도 잦은 웃음에 안색은 밝았고 가시 같던 몸집에도 나잇살이 붙어 시간의 거리감이라곤 전혀 없이 늘 만나오던 사이처럼 푸근하고 편안했다.

함께 상추를 솎고 토장을 끓여 점심을 먹은 후, 멀지 않은 절터로 두릅을 꺾으러 집 뒤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그녀와 함께 올라갔다. 지천으로 피고 지는 민들레나 제비꽃 한 포기라도 밟을까 조심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보고 외모는 투덕해졌지만 섬세함은 여전하다는 것을 느끼며 그간에 못한 얘기들을 하며 언덕길을 오르느라 숨이 가빴다.

말이 절터이지 우북하게 자란 잡초 밭 가장자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두릅나무 가지를 조심스레 당겨 두릅을 꺾으면서 남편이 좋아했던 두릅을 이제는 먹을 사람이 없다며 모두 가져가라는 그녀 말에 하마터면 가시에 찔릴 뻔 했다. 놀란 내게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도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작은 아이 때문만이 아니라 암 진단을 받은 남편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인간다운 임종을 위해서라는 고백에는 할 말이 없었다. 보름 전에 남편의 네 번째 기제를 지냈으며 성치 않은 아들을 혼자 감당해야하는 장차의 부담이나 외로움도 크지만 참혹한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에서 편히 쉴 남편을 생각하면 지금 자신의 두려움이나 외로움은 고통이 아니라는 말을 담담하게 하는 그녀 얼굴은 부처의 얼굴이고 한 마디 한 마디는 귀한 법문이었다.

“돌아가는 길도 멀고 기다리는 시어머니가 있으니 너도 가야겠지만, 요즘 제빵에 흠뻑 빠진 내 작은 아들도 복지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니 이제 내려가자.”며 꺾은 두릅을 주섬주섬 모아 앞서 내려가는 발걸음이 심하게 겅중거렸다. “하늘 저 높은 곳에 있으니 좋아하는 두릅은 먹을 수 없지만 좋아하는 제비꽃은 맘껏 볼 수가 있겠지?”

그녀의 귀틀집 근처에 제비꽃이 지천인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조심스럽고 겅중거리는 그녀 발걸음이 단지 몸에 밴 섬세함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절이 없는 절골에는 부처 대신 오랜 내 친구가 살고 있고, 남편이 떠난 후에도 남편이 좋아했던 제비꽃을 진실한 사랑으로 가꾸는 내 옛 친구가 살고 있다.

김현옥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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